http://m.sports.naver.com/kfootball/news/read.nhn?oid=490&aid=0000000215
고지식한 축구선수, 공부에 눈뜨다
서울 남강고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할 때, 송 이사장은 ‘범생이’로 통했다. 스스로를 “고지식하다”고 표현하는 송 이사장은 이때부터 맡은 바에 열심인 착한 축구선수였다. 다른 곳에 한눈팔 새 없이 축구에 전부를 쏟았다. 하지만 노력에 비해 기회는 오지 않았다. 송 이사장은 “당시에는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만 대학에 갈 수 있는 문이 열렸는데, 마침 우리 팀이 4강 입상을 못했다. 집안 형편이 좋은 편도 못됐다. 보통 고등학교 3학년 8~9월이면 진학할 학교가 정해지는데, 그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”고 말했다.
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쯤부터였다. 축구부 친구가 아닌 일반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그동안 담을 쌓고 지냈던 공부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. 송 이사장은 “처음에는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. 그저 워낙 공부를 안 했으니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컸다. 운동이 끝난 저녁에 일반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. 친구들이 책도 빌려주고 많이 도와줬다. 축구밖에 모르던 운동선수가 갑자기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‘또라이’라는 소리 좀 들었다”며 웃었다.
학력고사 성적표가 나오던 날 ‘또라이’는 ‘미친놈’이 됐다. 일반 학생들과 견주어도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. 성적표를 나눠주던 담임 선생님은 깜짝 놀랐고, 반 친구들 전체가 박수를 쳐줄 정도였다. 송 이사장은 ‘공부로 대학에 간 남강고 1호 축구선수’가 됐다.
간절함으로 나를 증명하다
“수원대 체육과 진학 후 한 학기는 그냥 놀았다.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힘들게 훈련도 안 해도 되니 좋더라. 그런데 딱 한 학기였다.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. 축구할 때도 고지식하게 축구만 하던 나였다. 열심히 사는 것이 이미 내 습관이었다. 열심히 운동을 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만큼 좌절감이 컸다.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. 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그때부터는 축구가 아니라 공부였다. 그래서 친구들과 선배들한테 선언했다. 이제 안 놀고 공부하겠다고. 교수가 되겠다고. 다시 ‘또라이’ 소리를 들었다.”
송 이사장의 독한 공부가 시작됐다. 대학교 생활 내내 아침 일찍 제일 먼저 도서관에 가 불을 켰다. 밤에는 제일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도서관을 나왔다. 방학 때면 청평에 있는 고시원에 들어가기까지 했다. 가장 열을 올린 것은 영어 공부였다. ‘I am a boy’부터 시작이었다.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. 한 번은 아는 선배가 “하나도 아는 게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오래 책상 앞에 앉아있냐”고 물었다. 송 이사장은 답했다. “형, 내가 머리 깎고 하루에 7~8시간씩 땡볕에서 운동하던 사람이야. 에어컨 나오는 시원한 도서관에 왜 못 있겠어?”
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은 송 이사장의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었다. 남강고 축구선수 시절 훈련 때문에 관악산을 오르내리며 보았던 그 학교였다. 서울대의 치열한 내부경쟁 속에서 스포츠심리와 여가 레크리에이션 석,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송 이사장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.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보다 간절했기 때문이다.
송 이사장은 “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. 다만 절실했다. 죽을 만큼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죽어도 좋을 만큼 열심히 했다. 축구로 꽃 피우지 못한 꿈이 억울하고 아쉬웠다.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. 내가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. 더 이상 축구는 아니지만 공부를 통해 나의 존재를 느끼고 싶었다”고 말했다.
고지식한 축구선수, 공부에 눈뜨다
서울 남강고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할 때, 송 이사장은 ‘범생이’로 통했다. 스스로를 “고지식하다”고 표현하는 송 이사장은 이때부터 맡은 바에 열심인 착한 축구선수였다. 다른 곳에 한눈팔 새 없이 축구에 전부를 쏟았다. 하지만 노력에 비해 기회는 오지 않았다. 송 이사장은 “당시에는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만 대학에 갈 수 있는 문이 열렸는데, 마침 우리 팀이 4강 입상을 못했다. 집안 형편이 좋은 편도 못됐다. 보통 고등학교 3학년 8~9월이면 진학할 학교가 정해지는데, 그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”고 말했다.
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쯤부터였다. 축구부 친구가 아닌 일반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그동안 담을 쌓고 지냈던 공부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. 송 이사장은 “처음에는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. 그저 워낙 공부를 안 했으니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컸다. 운동이 끝난 저녁에 일반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. 친구들이 책도 빌려주고 많이 도와줬다. 축구밖에 모르던 운동선수가 갑자기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‘또라이’라는 소리 좀 들었다”며 웃었다.
학력고사 성적표가 나오던 날 ‘또라이’는 ‘미친놈’이 됐다. 일반 학생들과 견주어도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. 성적표를 나눠주던 담임 선생님은 깜짝 놀랐고, 반 친구들 전체가 박수를 쳐줄 정도였다. 송 이사장은 ‘공부로 대학에 간 남강고 1호 축구선수’가 됐다.
간절함으로 나를 증명하다
“수원대 체육과 진학 후 한 학기는 그냥 놀았다.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힘들게 훈련도 안 해도 되니 좋더라. 그런데 딱 한 학기였다.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. 축구할 때도 고지식하게 축구만 하던 나였다. 열심히 사는 것이 이미 내 습관이었다. 열심히 운동을 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만큼 좌절감이 컸다.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. 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그때부터는 축구가 아니라 공부였다. 그래서 친구들과 선배들한테 선언했다. 이제 안 놀고 공부하겠다고. 교수가 되겠다고. 다시 ‘또라이’ 소리를 들었다.”
송 이사장의 독한 공부가 시작됐다. 대학교 생활 내내 아침 일찍 제일 먼저 도서관에 가 불을 켰다. 밤에는 제일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도서관을 나왔다. 방학 때면 청평에 있는 고시원에 들어가기까지 했다. 가장 열을 올린 것은 영어 공부였다. ‘I am a boy’부터 시작이었다.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. 한 번은 아는 선배가 “하나도 아는 게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오래 책상 앞에 앉아있냐”고 물었다. 송 이사장은 답했다. “형, 내가 머리 깎고 하루에 7~8시간씩 땡볕에서 운동하던 사람이야. 에어컨 나오는 시원한 도서관에 왜 못 있겠어?”
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은 송 이사장의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었다. 남강고 축구선수 시절 훈련 때문에 관악산을 오르내리며 보았던 그 학교였다. 서울대의 치열한 내부경쟁 속에서 스포츠심리와 여가 레크리에이션 석,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송 이사장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.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보다 간절했기 때문이다.
송 이사장은 “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. 다만 절실했다. 죽을 만큼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죽어도 좋을 만큼 열심히 했다. 축구로 꽃 피우지 못한 꿈이 억울하고 아쉬웠다.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. 내가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. 더 이상 축구는 아니지만 공부를 통해 나의 존재를 느끼고 싶었다”고 말했다.